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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의 ‘개성’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고유명사는 “낱낱의 특정한 사물이나 사람을 다른 것들과 구별하여 부르기 위하여 고유의 기호를 붙인 이름”으로 정의된다. 고유명사는 그 이름으로 부르는 대상이 유일하지 않다고 해도 여전히 고유명사이다. 다시 말해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모두 ‘에드윈’이라고 불린다고 해서 ‘에드윈’이 고유명사가 아닌 것은 아니다.
고유성은 “어떤 사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질이나 그 사물 특유의 속성”(표준국어대사전)을 의미한다. ‘고유’는 이를 정의하는 데 사용된 ‘특유’라는 단어 때문에 온전히 그 사물만 가지고 있는 성질을 가리키는 듯 보이지만, ‘특유’와 구별되는 ‘고유’의 속성은 ‘본래부터 가지고 있’음에 있다. 고유명사와 마찬가지로, 한 사물이 가지고 있는 어떤 속성이 다른 사물에서 발견된다고 해서 그것이 그 사물의 고유성이 아니라고 볼 수는 없다. 고유성은 보편성의 반대어일 뿐 특유성의 동의어가 아니다.
‘개성’은 이러한 고유성의 개념이 사물이 아닌 사람에 적용된 단어이다. 이 단어는 대다수 디자이너에게 상당한 강박을 준다. 평범함에 열등감을 느끼는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러나 개성 역시 고유성과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이나 개체와 구별되는 고유의 특성(표준국어대사전)“에서 ‘특수성’이 아니라 ‘본바탕’, 즉 나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 아니라 내가 본래 가지고 있는 바탕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내가 가진 개별 속성들은 그리 다양하지도 특별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그러한 속성의 합인 ‘나’는 세상에서 유일하다.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말하듯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 그러니 개성이 없는 사람은 없으며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할 뿐이다. 개성을 가지고 싶다면, 새로운 속성을 얻고자 애쓸 게 아니라 내가 가진 속성들이 무엇이며 그것들이 서로 맞물려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어쩌면 고유성은 특정 속성이 아닌 그 속성들의 관계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겠다.)
디자이너로서 특이해도 괜찮지만 디자이너라서 특이할 필요는 없다. 개성은 특이성이 아니다.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혹은 디자이너로 살기 위해 더 많이 경험하고 치열하게 생각하며 시각을 넓혀야 한다는 점에 이견은 없다. 그러나 남과 달라야 한다는 강박에서는 조금 자유로워졌으면, 더불어 스스로의 내면에는 조금 더 관심을 기울였으면 싶다. 차별화되어야 하는 것은 결과물이지 그것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2022.4.20

[예전글] 디자인용어로서 보는 ‘디자인자산’

2009년 7월, ‘세계디자인수도 서울 2010’을 앞두고 있던 서울시는 당시로써는 무척 생소했던
‘디자인자산’이라는 말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서울디자인자산’은 디자인 관점으로 서울의 고유 자산을 재해석하고, 서울의 디자인 발자취를 근현대를 넘어 오래된 전통으로까지 연결함으로써 서울의 디자인 역사를 재발견하고자 한 사업이었다. 서울시는 분야별 전문가들과 약 14개월간 자산 후보 수집, 후보 대상 연구, 심화연구라는 세 가지 절차를 통해 총 51개 디자인자산을 선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온 연구물은 2010년 한 해 동안 단행본, 영상, 전시 등 다양한 형태로 가공되어 활용되었다.
사업 이름으로 사용된 말 ‘디자인자산’은 그 시기에 만들어진 콘텐츠와 함께 소비되다가 어느 틈엔가 우리 주위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디자인회사의 디자인자산. 어느 날 문득 떠오른,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AG ISSUE 6호에서는 2009~2010년 즈음에 활발히 사용되었던 ‘디자인자산’을 사업 명칭이 아닌 디자인용어로서 재발견하고자 한다.

‘디자인자산’의 정의
2009년 서울시에서 사용한 ‘디자인자산’의 의미는 ‘디자인 관점으로 바라본 혹은 바라볼 수 있는 (서울의) 자산’이다. 이는 사업을 설명하기에는 별 무리가 없으나 용어로 사용하기에는 모호한 개념이다. 마케팅 분야의 용어 ‘브랜드자산’의 경우, 세계적인 브랜드 마케터인 케빈 레인 켈러(Kevin Lane Keller)는 이를 ‘어떤 제품 혹은 서비스가 브랜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바람직한 마케팅 효과’이자 ‘마케팅활동에 대한 소비자의 차별적 반응’이라고 정의하였다. 즉 브랜드가 없어도 제품이나 서비스가 존재하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아닌 브랜드가 있을 때만 얻을 수 있는 효과 또는 반응이 곧 ‘브랜드자산’이다.
디자인을 기업 및 단체의 무형자산으로 본다면, 디자인자산 역시 브랜드자산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켈러의 정의를 빌린다면 ‘디자인자산’은 ‘어떤 제품 혹은 서비스가 디자인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긍정적인 마케팅 효과 혹은 차별적 소비자의 반응’이다. 그러나 디자인의 대상이 특정 제품이나 서비스, 마케팅 활동에만 국한되지 않으므로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수정할 수 있다. ‘어떤 대상을 디자인함으로써 나타난 긍정적인 효과 또는 차별적 반응.’
이 정의를 따르면, 서울의 디자인자산은 ‘무언가를 디자인함으로써 경제, 문화 등의 측면에서 서울에 발생한 긍정적이고 차별적인 효과나 반응’이라는 전보다 훨씬 구체적인 개념을 지시하게 된다. 무엇이 디자인자산이며 무엇이 디자인자산이 아닌지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이 단계에서 가능하다.

디자인회사의 ‘디자인자산’
디자인 활용 업체가 보유한 디자인자산과 디자인 전문회사의 디자인자산은 무게감이 사뭇 다르다. 디자인 전문회사는 무언가를 디자인한 결과가 기업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디자인함으로써 바람직한 경제적 효과 또는 반응을 일으키지’ 못하는, 다시 말해 디자인자산이 없는 전문회사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디자인회사가 겪는 경제적 위기는 경기 침체와 같은 외재적 요소뿐 아니라 디자인자산의 부실함이라는 내재적 요소에도 기인할 수 있다.
디자인 부흥기였던 1990년대 한국에는 수많은 디자인 전문회사가 설립되었다. 나라 전체가 어려웠던 IMF 시기에도 이듬해 매출액이 증가할 것으로 예측할 만큼 당시 디자인 업계의 성장은 눈부셨다. 그 시절 디자인 전문회사들은 어떤 디자인자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한국디자인진흥원(KIDP)이 1998년 초 실시한 ‘디자인 전문회사 인력현황 및 실태조사’ 보고서에는 디자인 회사들의 주요 투자 내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97년 매출액을 기준으로 각 항목별 투자내역을 살펴보면 인건비에 대한 투자가 매출액의 26.0%(2억4천9백4십만 원)를 차지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함. 매출액이 적은 업체일수록 대출액 대비 투자율은 높아, 매출액 2억 원 이하의 업체에서는 총 투자율이 131.4%로 상당한 적자를 감수하면서 운영하는 상황임.

디자인 전문회사 인력현황 및 실태조사, 한국디자인진흥원, 1997

몇 쪽을 넘기면 이와 더불어 읽기에 인상적인 내용이 이어진다.

디자이너의 업무 만족도는 높다(46.8%), 보통(47.2%), 낮다(6%)로써 비교적 높은 업무 만족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디자이너의 업무 만족요인은 ‘업무의 전문성’. ‘능력발휘 기회’ 등 업무 자체 요인이 주로 나타났고, 디자이너 업무 불만족 요인은 ‘업무과다’, ‘임금수준 미흡’, ‘회사의 불확실한 장래’ 등 회사 체계에 대한 것이 주로 나타났다.

디자인 전문회사 인력현황 및 실태조사, 한국디자인진흥원, 1997

디자인 전문회사의 인건비에 대한 투자는 비교적 최근인 2013년에도 다른 항목에 비해 월등히 높다고 조사되었으나 ‘저임금에 따른 전문 인력 부족’ 역시 심각한 상태였다. 디자이너의 업무 만족도는 2007년 조사에서는 보통(65.4%), 높다(23.9%), 낮다(10.7%)로 전체적인 만족도가 10년 전보다 크게 떨어졌으며 2011년부터는 조사되지 않았다.
디자인 전문회사에서 디자이너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투자 비중이 가장 높은 핵심 자산이다. 그러나 이들이 느끼는 감정은 언제부터인가 간과되고 있다. 디자이너의 업무 만족도는 ‘무언가를 디자인함’으로써 생겨난 결과이며, 이들의 ‘높은 업무 만족도’는 다시 좋은 제작물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됨으로써 회사에 수익과 명성을 안겨 주는, 바람직한 경제 효과에 해당한다. 당시에 이런 업무 만족감은 디자이너가 대기업이 아닌 디자인 전문회사를 택하는 결정적 이유이기도 했다. 디자인회사에서 디자이너의 업무 만족도는 중요한 디자인자산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많은 디자인회사는 이 자산을 거의 잃은 것으로 보인다.

시사점
사업 명칭으로서 언급된 ‘디자인자산’은 디자인계에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디자인용어로서 재정의한 이 말은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 준다. 먼저, 객관적인 관점에서 무엇이 디자인자산이며 여러 디자인자산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논의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디자인회사라는 전제를 달았을 때는 디자인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 또는 집단이 소유해야 할 자산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 ‘디자인자산’은 분명 디자인 현장에서 실무자가 서로 소통하는 데 필요한 용어는 아니다. 그러나 디자인 현상을 파악하고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용어임은 분명하다.
인간의 삶과 그 본질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을 철학이라 한다. 철학이 없어도 인생은 흘러가고 지식과 산업은 발달하겠지만, 그 깊이는 상대적으로 얕아질 수밖에 없다. 무엇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가, 무엇이 디자인회사를 디자인회사답게 하는가와 같은 본질적 물음은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 용어는 개념을 담는 그릇이자 논의의 시작점이다. 디자인 분야가 스스로 깊이를 더하고 근간을 다지기 위해서는 제 분야의 고유성을 담아내기 위한 용어를 계속해서 발굴하고 정립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AG ISSUE 12. 2015.5.12
(원 글에서 일부 표현 수정함)


참고문헌
《디자인 전문회사 인력현황 및 실태조사》, 한국디자인진흥원, 1997
《디자인 전문회사 인력현황 및 실태조사》, 한국디자인진흥원, 2007
<브랜드 수명주기(Brand Life cycle)에 따른 브랜드 자산(Brand Equity) 발전 방향 연구>, 브랜드디자인학연구, 3(1), 2005
<브랜드 자산>, KOCW, 문화와 국가브랜드(최선경) 강의 자료
<서울의 디자인 자산은 얼마입니까>, 서울문화투데이, 2009.7.6

[예전글] 디자인 용어로서 보는 ‘이야기’

이야기가 하나의 산업으로 분류되는 시대이다. 2014년부터 이야기 산업의 범위와 실태를 조사하는 여러 연구가 진행되었고 이야기 산업 활성화를 위한 법 제정 및 플랫폼 구체화가 본격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간 디자인 분야에서도 이따금 그러나 주요하게 언급되었던 단어이다.

“지금 시대에서 스토리가 없는 디자인은 죽은 디자인과 같아요.”

삼성전자 공식 블로그, 2012

우리는 ‘이야기’의 사전적 정의를 알므로 이 문장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스토리 없는 디자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나의 산업으로서 육성되고 있는 ‘이야기’와 현시대의 디자인에 생기를 불어넣는 ‘이야기’는 과연 같은 의미일까? 어떤 단어가 한 분야에서 주요하게 언급될 때 그것은 지시적 의미를 넘어 특정한 개념을 담아낸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같은 개념을 표현하고자 그 단어를 사용하면 그것은 용어가 된다. 이번 호에서는 디자인 용어로서 ‘이야기’의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콘텐츠의 원천 재료: 줄거리로서의 이야기

“지난해 중국에서의 ‘별에서 온 그대’ 열풍은 한류의 지속적 확산을 이끌 새로운 동력으로 자리매김했다. 배우들의 열연과 웰메이드 연출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흡입력 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문체부, 이야기산업 진흥 기반 공론화 나서>, 연합뉴스, 2015.7.9

《표준국어대사전》은 이야기를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로써 가장 먼저 정의한다. 이야기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인물, 사건, 배경 등
3요소가 필요하며, 이들로 구성된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줄거리는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로써 2차 가공된다. 《2014 이야기 산업 실태조사》(한국콘텐츠진흥원)는
이야기가 “주로는 ‘수용자의 정서적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발신자가 인물, 사건, 배경 등의 요소를 배열하여 만들어낸 줄거리’를 의미하며, ‘정서적 공감을 기초로 움직임을 이끌어내기 위해 만든 서사 구조’의 의미까지 포함”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줄거리로서의 이야기는 콘텐츠를 제작하는 핵심이자 원천 재료이며, 때로는 의미 있는 디자인 재료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책을 디자인할 때 원고의 줄거리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줄거리 유무로 디자인의 가치를 평가한다는 접근은 어불성설이다.


디자인의 원천 재료: 경험으로서의 이야기

“말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아내가 자신에게 항복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멘디니의 욕구를 다른 남성 소비자들도 직관적으로 느끼지 않을까? 솔직하고 사실적인 이야기는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공감을 일으키고 구매 욕구로 이어진다.”

<디자인경영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는>, 연합뉴스, 2011.7.22

“과연 소비자가 갈구하는 제품은 평범한 것이 아닌 특별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기능성과 함께 감성을 자극하는 스토리가 세올 디자인에 열광하는 이유다.”

<색다른 스토리가 있는 감성 디자인>, 디자인정글, 2006.6.20 (2022년 1월 현재 검색 실패 , 해당 기사의 인용 글만 검색 가능)

이탈리아 디자이너인 알렉산드르 멘디니의 와인오프너나 한국 세올디자인컨설팅의 첼로 케이스는 인물, 배경, 사건으로 구성된 특정 줄거리에서 출발한 디자인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여기에 담긴 ‘이야기’를 읽고 정서적으로 공감한다. ‘이야기’의 또 다른 정의는 바로 ‘자신이 경험한 지난 일이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남에게 일러 주는 말’이다.
UX 개념의 창시자인 도널드 노먼 박사는 2011년 성균관대 총장과의 대담에서 “미래는 ‘경험 디자인’이 될 것이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하고 경험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에 더 집중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디자인 분야에서 ‘경험’은 화두를 여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디자인 패러다임을 표현하는 핵심 용어로 자리 잡았다. 사용자의 경험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된 대표적인 도구는 ‘디자인리서치’이다. 과학적 기법을 통해 사용자를 관찰하고 분석하여 더 나은 경험을 만드는 ‘디자인리서치’는 디자이너 개인의 역량에 온전히 의존했던 기존 디자인 과정을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영역으로 크게 한 걸음 옮겨왔다. 그러나 디자인에는 여전히 뭐라 규정하기 어려운, 디자이너의 직관으로 실현되는 미지의 영역이 남아 있다.
‘이야기’는 경험 디자인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디자인리서치’와는 다른, 디자이너의 감성과 통찰에 따른 문제 해결을 가능케 한다. 남다른 시각으로 일상을 재발견하는 디자이너의 독창성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부러움과 경탄의 대상이 되어왔다. 만약 ‘이야기’에 “사용자의 정서적 호응과 감탄을 끌어내기 위해 디자이너의 시각으로 재발견한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경험”이라는 의미를 담는다면, 우리는 ‘이야기 있는 디자인’이 왜 이 시대에 중요하며 그것이 경험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역시 설명할 수 있다.

이야기는 줄거리나 경험 외에도 구담, 소문, 소설 등의 사전적 의미를 지닌다. 다양한 의미만큼이나 빈번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일상어로서 지나치기 쉽지만, 디자인 분야에서 쓰이는 단어 ‘이야기’는 때로 이런 단순 지시적 의미가 아닌 디자인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는 개념을 담고 있다. 화자들이 이를 의식적으로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의식적으로 썼다 한들 명확하게 의미가 정립된 상태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디자인 용어로서 ‘이야기’는 잠재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같은 디자이너의 창조적 디자인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는 지속해서 발굴되어야 한다.

AG ISSUE 12. 2015.8.11


참고문헌
<감성 디자인’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매일경제, 2013.8.29
<문체부, 이야기산업 진흥 기반 공론화 나서>, 연합뉴스, 2015.7.9
<삼성전자 디자인을 말하다 – Story 편>, 삼성전자 공식 블로그, 2011.5.24
<도널드 노먼 박사 – 김준영 성균관대 총장 대담>, 성균관대 총장실 블로그, 2011.7.22 (현재 접속 불가)

<Cover Story `감성디자인 구루` 도널드 노먼 박사 – 김준영 성균관대 총장 대담>, MK뉴스, 2011.7.22
<색다른 스토리가 있는 감성 디자인>, 디자인정글, 2006.6.20 (현재 접속 불가)
《2014 이야기산업 실태조사》, 한국콘텐츠진흥원, 2014.10



[예전글] 디자이너의 본질, 이타적 창조성

예전에는 디자인을 전공하는 이가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그림 잘 그리겠다’는 말이었다. 정부와 기업에서 ‘디자인’을 강조하면서부터는 그 말이 ‘창의적이겠다’로 바뀌었다. 디자이너는 남과 달라야 하고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해진 사회이다. 디자인 교육은 창의성을 키우기 위한 교육이고, 그런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디자인 교육을 초등 교육에도 도입하여 몇 년 전에는 디자인 교과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의문이 생겼다. 디자인 교육의 우선순위에 창의성을 두는 것이 정말 가장 이상적인가, 디자이너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정말 창조성인가 하는.

지난 2015년 10월 광주 국제디자인총회에서 기조연설자 중 하나인 번 슈미트(Bernd Schmitt) 교수는 “미래에는 로봇이 디자이너를 대체할 수도 있다.”는 다소 극단적인 발언을 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디자이너 중 그 주장에 동의하는 이는 없어 보였고, 디자인 총회에서 그런 발언은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그가 본인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덧붙였던, 컴퓨터와 같은 비인간적인 것이 인간보다 더 창조적일 수 있으며,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이 더욱 발전했을 때 기존과 다른 결과물을 랜덤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컴퓨터를 따를 수 없을 것이라는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이미 한 달여가 지났고 당시 동시통역으로 들었으니 슈미트 교수가 말한 내용과 일부 다를 수 있다.) 지금도 아론(Aaron), 엠미(EMI)와 같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여느 예술가 못지않은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던가. 그가 말한 대로 디자이너의 본질이 창조성, 곧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있고 지금의 디자인 교육이 그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어떻게 미래의 컴퓨터가 현재 존재하는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대체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미 컴퓨터는 디자인 관계 분야에서 여러 직무를 대체해 왔고 디자이너의 역할을 변화시켰다. 미래에도 여전히 디자인이라는 업무를 디자이너가 담당할 수 있을까? 컴퓨터 없이 일할 수 없는 사회에서 기획자가 잘 프로그래밍된 미래의 로봇을 부리면서 내놓는 결과물과 기획자가 디자이너와 협업하여 내놓는 결과물은 어떻게 다를까. 만약 어느 쪽도 적합하지 않으며 창의적인 기획자와 잘 프로그래밍된 로봇 사이에 디자이너가 존재해야 한다면 그렇게까지 비용을 높이면서 기업과 단체가 이 조합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날 디자인교육 세션에 참여했던 디에고 지오반니 베르뮤데즈 아귀르(Diego Giovanni Berm dez Aguirre) 교수는 지금까지 쌓였던 나의 의문을 한 번에 해소할 수 있을 만한 답을 주었다. “디자이너는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일하며 그 기본은 ‘이타’에 있다. 그러니 어떻게 로봇이 이를 대체할 수 있겠는가.” 디자이너는 창조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디자이너의 창조성은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 이런 속성을 ‘이타적 창조성’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많은 디자인계 인사들은 앞으로 디자이너의 역할이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표현의 영역에 갇혀 있지 말고 설계, 기획의 영역으로 확장, 통합해 가야 한다고. 이 과정에서 디자이너에게는 인문학과 인간공학이라는 소양이 요구된다. 바로 사람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나 지금의 디자인 교육은 여전히 창의성에만 매달리고 있다. 사람에 대한 이해는 창의성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이며, 가슴이 아닌 머리로 습득된다. 오늘날의 디자이너는 누구보다 사람다워야 하는 게 아닐까. 디자이너의 본질이 이타적 창조성이며 디자인이 기본적으로 사람을 위한 것임이 분명해지지 않는다면, 컴퓨터가 디자이너의 영역을 대체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후 몇 번이고 계속될 것이다.

AG issue 16. 2015.11.8


참고문헌
<컴퓨터가 피카소에게 도전한다> 한겨레21. 1998.12.31. 제239호
<인공지능이 창조한 예술품들> 동아사이언스. 2007.4.17
<Undiscovered Bach? No, a Computer Wrote It> 1997.11.11

<ALGORITHMIC MUSIC – DAVID COPE AND EMI>. 2015.4.29

[예전글] 2019.5.13

사람은 사고나 질병으로, 간절히 노력하지 않으면 살아있을 수 없는 날들을 맞기도 한다. 아프기 전처럼 숨 쉬고, 먹고, 자고, 누고, 걷기 위한 노력들은 생각보다 훨씬 힘겹고 몸의 통증이란 건 무뎌지기는커녕 저보다 더 큰 두려움을 나날이 몸과 마음에 새긴다.

그럼에도 사람이 ‘나는 살아나고 말겠다’는 어려운 선택을 하는 이유는, 살아있을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 땅에 아직 자신이 할 일이 남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즉 그 일은 이 땅에서 그이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자 자신의 존재 가치를 온전히 느끼게 하는 일이다.

그러니 그이를 살리기 위한 과정이 그이에게서 그 일을 멀어지게 한다면 그 살아남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2021.4.22

전문가가 자기 분야에서 용어를 제대로 사용하는 일은 중요하다. 글을 적을 때 특히 그러한데, 디자인 분야에서는 용어를 말할 때뿐 아니라 표기할 때도 그 용어의 정의(definition)가 아니라 개인의 직감이나 통찰력에 따라 쓰는 경향이 있다. 그 감각이 틀렸다는 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러다보니 용어 사용이 지나치게 혼란스럽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고 대다수가 따라야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진다. 용어 역시 언어이니 그러한데, 이 분야에서는 사전마저도 따라야 할 기준보다는 하나의 제안, 선택사항처럼 받아들여지는 듯 보인다. (이런 태도는 디자이너들의 기본 속성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한국어 용어는 한국어의 범주 안에 있으니 한국어 어문규정을 준수해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도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듯한 모습이고. (의도인지 무지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니 역시 이 분야에서 용어 사전은 ‘이상’일 뿐 현실에서는 용례가 포함된 유의어 사전 정도가 유효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예전글] 2014.7.5

큰 실수로 자신이 없어지고 도망가고 싶고 두려움마저 들 때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이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처음 마음을 상기하는 것.

아마도 나는 어느 순간 그 마음을 잊고,
몇 푼의 돈을 벌기 위해 또는 주어진 시간을 보내기 위해 또는 맡은 바 책임을 다하기 위해 그 일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단순히 그런 이유뿐이라면 무리해서 그 일을 붙잡지 않아도 괜찮다.
미련이 조금 남더라도 그만두는 게 낫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라면 괴로워도 잠시 숨을 고르며 기다려야 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
이 시간은 금방 지나갈 것이다. 그저 과정일 뿐이다. 딛고 올라서면 그뿐이다.

[예전글] 2014.4.15

자신의 경험으로 상대를 판단한다.
내가 겪은 그가 그의 전부가 아니고 네가 겪은 그도 그 전부가 아니다.
내가 보는 그와 네가 보는 그의 모습은 다를 수 있고
우리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그 두 면이 서로 부딪친다면 어떨까.
그가 의도적으로 다르게 자신을 꾸몄다면 너와 내가 그와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같은 경험을 하고 다르게 판단했다면 ‘그는 이런 사람’이라는 주관적 명제를 누군가 혹은 각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회적 관계에서 서로 다른 가면을 쓰는 일은 피할 수 없다.
사람들은 살아가며 가면 쓰는 법을 익히고 그 가면을 적절히 활용한다.
가면을 악용하지 않는 한, 가면을 쓰는 일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자신처럼 다른 이들도 가면을 쓰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자신의 경험으로 상대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판단은 ‘그’라는 참 명제를 찾기 위한 도구로 존재해야 하며, 내가 임의로 세운 명제 ‘그는 이런 사람’에 그가 부합하는지 판정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