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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고 그에 따라 심경의 변화도 컸다.
그래서, 두 달 이상이 남아있음에도, 이미 몇 해가 흘러간 느낌이다.
그제는 나름 중요했던 발표를 마쳤고, 어제는 그 일 때문에 미뤄두었던 몇 가지 일을 처리했다.
그저 매일매일을 살아간다. 오늘 하기로 했던 일을 하고, 그 일을 하고 나면 그에 다행스러움을 느끼고.
삶의 의지를 좀먹는 마음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조금이라도 내게 즐거운 일을 하면서
주어진 삶에 충실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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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건 슬픈 일이다.

이를 잊고자 무디게
아무런 변화도 알아채지 못하게
눈을 내리깔고 초점을 흐리며 산다.

그렇게 잘 외면하며 살다가도
순간 눈에 띈 사소한 변화가 마음을 파헤치면
또 슬픔이 한참을 머문다.

알아챈다 한들 어찌할 수 없다는 차가운 무력감이
이 슬픔을 다시 마음 깊이 묻을 때까지.
마른 눈으로 다시 초점을 흐릴 수 있을 때까지.

2019.5.10
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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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안 된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 정말 안 되는지 따져보면 그렇지 않고, 된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 정말 되는지 따져보면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래도 맞고 저래도 맞다는 식으로는 여러 사람과 일하며 성과를 내기 어렵다. 결국 기준과 원칙을 세우고 융통성을 적절히 발휘해야 하는데 전체 판을 주의 깊게 살피지 못한 상태에서 결정을 내리게 되면 누군가의 일이 헛수고가 되거나 배로 늘어나기 십상이다. 마감에 가까워진 상황에서는 다들 일에 치이는 상태이니 더욱 주의해야 한다. 모두들 자신의 시간과 애정을 일에 쏟은 만큼 물질적으로 감정적으로 보상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결정은 궁극적으로 이를 지향해야 한다.

2.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말을 더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직장 일과 가정 일의 균형” 혹은 “일과 쉼의 균형”이라면 모를까, 일과 삶의 균형이라니. 삶은 일로만 구성되지 않으며 일은 삶의 진부분집합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유형의 일을 조화롭게 해 나갈 수 있고 그러면서 적절한 쉼 역시 가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환경은 저절로 한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허심탄회하게 문제를 공유하고 개선해 나갈 수 있는, 서로를 신뢰하고 존중하는 구성원이 필요하다.

3.
명백히 바쁠 시기에 새로운 분야에 대한 학업을 다시 시작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부정적으로 비춰질지 모르겠다. 한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걸 공부하지 않고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의 구조를 반 밖에 이해할 수 없는데다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소통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발자와 디자이너, 기획자는 멘탈모델이 다르고 문제를 풀어가는 접근방식 역시 다르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어렴풋이 더듬어가며 상대를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모르기 때문에’ 생각의 구현 그 마지막 단계를 전혀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이 답답해서 참을 수 없었다. 바쁜 시기에 학업을 병행하니 따라가기에 급급하고 겉핧기에 그치는 부분이 없지 않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답답한 것 투성이지만.

4.
완전히 다른 것은 오히려 이해하고 수용하기 쉽다. 3자로서 바라보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거의 비슷해 보이는데 맥락이 조금 다른 것이 어렵다.(게다가 그 ‘조금’ 다른 게 핵심이다.) 이것과 저것의 다름을 굳이 구분하지 않고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세상에서 살아온 이들에게는 그것이 다름으로 느껴지지 않고 때로 그것이 왜 중요한지조차 이해할 수 없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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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01「명사」
자기를 가르쳐서 인도하는 사람. ≒사부11(師傅)「1」.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스승’을 위와 같이 정의한다.
‘스승’에는 ‘선생’과 달리 ‘어떤 일에 경험이 많거나 잘 안다’거나 ‘학예가 뛰어나다’는 전제가 없다. ‘스승’은 ‘선생’과 달리 ‘학생을 가르치는’ 직업인이 아니다.
‘스승’은 절대적이거나 범용적인 기준이 아닌 온전히 ‘나’의 관점으로 선택되는 대상이다. ‘선생’과 달리 ‘스승’은 ‘나’의 선택 없이 외부의 법이나 방침에 따라 일방적으로 주어질 수 없는 대상이다.

학생이었던 시절, 나는 수많은 선생 중에서 한 명의 스승을 만났고 또 한 명의 스승을 ‘선택’했다. (‘선택’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건 그분과 내가 스승과 제자로 일대일 관계를 맺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한 명의 스승은, 내게 상당히 복잡한 감정을 주는 대상이다.
나는 아직도 내가 밤잠 못 자며 해낸 일에 그 스승이 놀라며 칭찬했던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밤잠 못 자며 노력해서 처음으로 해냈던 일은 고3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던 일과 장학생으로 대학에 합격한 일이었지만, 그때 나는 그 성과를 감정적으로는 보상 받지 못했다.
내 부모님은 내가 하는 일을 가로막기보다 최선을 다해 돕는 존재였지만, 먼저 나의 필요를 채워 주거나 나를 앞서서 끌어주는 존재는 아니었다.
대학 때 만난 이 스승은, 내 부모님에게 받기를 기대할 수 없었던 수많은 경험을 내게 주었다. 처음 제대로 인정 받았고, 넓은 세계를 알았고, 일하는 법을 곁에서 배웠다. 진심 어린 조언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좋기만 한 관계가 어디 있던가. 10년이 훌쩍 넘은 세월 동안 나는 스승을 여러 번 실망시켰고, 스승 역시 내게 여러 번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그럼에도 그 스승에게 여전히 감사하고 그분을 존경한다. 더는 내게 새로운 가르침을 주지 않을지라도.
10년 넘게 마음 한켠에 걸려 있던 그분의 가르침을, 이제는 과거의 기억에 함께 접어 넣으려 한다.
“세상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도 있고, 잘하는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모두 좋은 선택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사명감으로 일하는 사람도 필요하다.”
여전히 공감하지만 이 문구에 더는 지금의 나를 끌어갈 만한 힘이 남아있지 않다..

다른 스승에게 나는, 그분이 선생으로서 만난 수많은 학생 중 하나이다.
그분이 나의 이름과 얼굴을 일치시키지 못하던 그 시기에 이미 그분은 내게 한 명의 스승이었는데, 그건 그분의 가르침을 내가 기억하기 때문이다.
“도망갈 생각하지 마라. 내가 끝까지 쫓아간다.”
10여 년 전 이 말을 들은 그때 장면이 떠오른다. 방학을 앞둔 마지막 수업 날, 초록색 칠판 앞에서 웃는 얼굴로 느긋하게 말씀하시던 그 모습이.
그때 결국 모두 도망갔고, 그분도 학생들을 쫓아가지 못하셨지만 그 말은 이후 내게 꽤 강렬하게 남았다. 졸업전시 작업을 지도하실 때 보여주신 모습이나 몇 년에 한 번 마주칠 때마다 지나가듯 던지신 “그거 아직 안 하고 여기서 뭐 하나?”는 질문 역시 그러했다. 그분에게는 의미 없는 안부인사를 대신하는 말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 순간에도 그 말을 기억한다. 무조건 끝까지 해야 한다고 무섭게 윽박지른 말이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텐데, 뭐랄까, 이 말은 양심을 건드리는 말이었달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이 말에 마음이 움직인다.

돌아보니 참 많은 시간이 지났다.
두 분의 스승을 모두 스물 셋에 마음에 들였다. 학생이라는 신분을 벗은 지 이미 오래이다. 이제는 과거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앞으로를 가야 할 때이다.
이제는 내가 누군가에게 스승이 되어주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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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디자인을 전공하는 이가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그림 잘 그리겠다’는 말이었다. 정부와 기업에서 ‘디자인’을 강조하면서부터는 그 말이 ‘창의적이겠다’로 바뀌었다. 디자이너는 남과 달라야 하고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이다. 디자인 교육은 창의성을 키우기 위한 교육이며, 서울시는 서울시교육청과 협업하여 2009년 초등학생의 창의 교육을 위해 디자인 교과서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의문이 생겼다. 디자인 교육의 맨 첫 줄에 창의성을 두는 것이 정말 이상적인가, 디자이너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정말 남과 다른 창조성인가 하는.

지난 10월 광주 국제디자인총회에서 기조연설자 중 하나인 번 슈미트(Bernd Schmitt) 교수는 “미래에는 로봇이 디자이너를 대체할 수도 있다.”는 다소 극단적인 발언을 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디자이너 중 그 주장에 동의하는 이는 없어 보였고, 국제적인 디자인 행사에서 그런 발언은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그가 본인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덧붙였던, 컴퓨터와 같은 비인간적인 것이 인간보다 더 창조적일 수 있으며,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상황에서 기존과 다른 결과물을 무작위로 만들어내는 일은 인간이 컴퓨터를 따를 수 없을 것이라는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지금도 아론(Aaron), 에미(EMI)와 같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여느 예술가 못지않은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던가. 그가 말한 대로 디자이너의 본질이 창조성, 곧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있고 지금의 디자인 교육이 그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어떻게 미래의 컴퓨터가 현재 존재하는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대체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미 컴퓨터는 디자인 관계 분야에서 여러 직무를 대체해 왔고 디자이너의 역할을 변화시켰다. 미래에도 여전히 디자인이라는 업무를 디자이너가 담당할 수 있을까? 컴퓨터 없이 일할 수 없는 사회에서 기획자가 잘 프로그래밍이 된 미래의 로봇을 부리면서 내놓는 결과물과 기획자가 디자이너와 협업하여 내놓는 결과물은 어떻게 다를까. 만약 어느 쪽도 적합하지 않으며 창의적인 기획자와 로봇 사이에 디자이너가 존재해야 한다면 그렇게까지 비용을 높이면서 기업과 단체가 이 조합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날 디자인교육 세션에 참여했던 디에고 조반니 베르무데스 아기레(Diego Giovanni Bermúdez Aguirre) 교수는 지금까지 쌓였던 나의 의문을 한 번에 해소할 수 있을 만한 낱말을 제시했다. “디자이너는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일하며 그 기본은 ‘이타’에 있다. 그러니 어떻게 로봇이 이를 대체할 수 있겠는가.”
디자이너는 창조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디자이너의 창조성은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 이런 속성을 ‘이타적 창조성’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많은 디자인계 인사는 앞으로 디자이너의 역할이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표현의 영역에 갇혀 있지 말고 설계, 기획의 영역으로 확장, 통합해 가야 한다고. 이 과정에서 디자이너에게는 인문학과 인간공학이라는 소양이 요구된다. 바로 사람에 대한 이해이다.
그러나 지금의 디자인 교육은 여전히 창의성에만 매달리고 있다. 사람에 대한 이해는 창의성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이며, 가슴이 아닌 머리로 습득된다. 오늘날의 디자이너는 누구보다 사람다워야 하는 게 아닐까. 디자이너의 본질이 이타적 창조성이며 디자인이 기본적으로 사람을 위한 것임이 분명해 지지 않는다면, 컴퓨터가 사람 대신 디자인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후 몇 번이고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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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 issue” 16호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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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세 층으로 나눠 보니,
1층은 실시간 처리해야 할 일들로 월말의 은행 창구 같이 복잡하고
2층은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끊임없이 CCTV로 살피는 보안경비실처럼 쉴 틈이 없고
3층은 등을 기댈 벽 하나 세워진 빈 방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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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하지 않은 일에는 무뎌질 필요가 있다.
몸은 늙어가고 그 안에 담긴 에너지의 총량 역시 점점 줄어든다.
쓸데없는 걱정과 자조(自嘲)로 낭비할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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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실수로 자신이 없어지고 도망가고 싶고 두려움마저 들 때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이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처음 마음을 상기하는 것.

아마도 나는 어느 순간 그 마음을 잊고,
몇 푼의 돈을 벌기 위해 또는 주어진 시간을 보내기 위해 또는
맡은 바 책임을 다하기 위해 그 일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단순히 그런 이유뿐이라면 무리해서 그 일을 붙잡지 않아도 괜찮다.
미련이 조금 남더라도 그만두는 게 낫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라면 괴로워도 잠시 숨을 고르며 기다려야 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
이 시간은 금방 지나갈 것이다. 그저 과정일 뿐이다. 딛고 올라서면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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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경험으로 상대를 판단한다.
내가 겪은 그가 그의 전부가 아니고 네가 겪은 그도 그 전부가 아니다.
내가 보는 그와 네가 보는 그의 모습은 다를 수 있고
우리는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그 두 면이 서로 부딪친다면 어떨까.
그가 의도적으로 다르게 자신을 꾸몄다면 너와 내가 그와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같은 경험을 하고 다르게 판단했다면 “그는 이런 사람”이라는
주관적 명제를 누군가 혹은 각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회적 관계에서 서로 다른 가면을 쓰는 일은 피할 수 없다.
사람들은 살아가며 가면 쓰는 법을 익히고 그 가면을 적절히 활용한다.
가면을 악용하지 않는 한, 가면을 쓰는 일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자신처럼 다른 이들도 가면을 쓰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자신의 경험으로 상대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판단은 “그”라는 참 명제를 찾기 위한 도구로 존재해야 하며,
내가 임의로 세운 명제 “그는 이런 사람”에 그가 부합하는지
판정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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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림로즈힐.
정원이 있는 주택. 그 옆에 펼쳐진 넓은 잔디 공원.
사람들은 걷고 뛰고 숨쉰다.
나무는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땅이 있기에 그 자리에 머문다.
참 자연스럽다.

메마른 도시 속에 자연을 끼워 넣은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를 도시화한 듯한 이곳.
서울과 참 다르다.

도시의 녹지화.
가로수를 심고 자투리 공원을 만든다.
시청 앞에는 잔디를 깔고, 한강 주변에도 나무를 심었다.
좋다. 그런데 어색하다.
왜일까?

한국의 자연 풍광에는 잔디가 흔하지 않다.
넓은 들판보다 울창한 숲이 익숙하다.
서울에는 한국의 자연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결과가 아닌 과정을 배워야 한다.
결과를 따라하기는 쉽지만, 그것은 결국 내것이 되지 않는다.
과정을 배워야 내것을 지키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너무나 급하게 발전해 왔기에 지금껏 우리에게는 과정이 없었다.

우리는 서구가 아니다.
‘서구다움’이 우리의 목표여서는 안 된다.
서구의 성과를 좇는다 해도, 마침내 그들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된다 해도
그들이 쌓은 과정은 우리 것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그들을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다움’을 찾아야 한다.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그들이 지금에 이르렀는지 살펴야 한다.
그 과정을 숙지하고 우리의 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거기에 왜 그런 모습으로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 왜 그것을 그대로 옮겨 놓으면 안 되는지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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