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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글] 디자인용어로서 보는 ‘디자인자산’

2009년 7월, ‘세계디자인수도 서울 2010’을 앞두고 있던 서울시는 당시로써는 무척 생소했던
‘디자인자산’이라는 말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서울디자인자산’은 디자인 관점으로 서울의 고유 자산을 재해석하고, 서울의 디자인 발자취를 근현대를 넘어 오래된 전통으로까지 연결함으로써 서울의 디자인 역사를 재발견하고자 한 사업이었다. 서울시는 분야별 전문가들과 약 14개월간 자산 후보 수집, 후보 대상 연구, 심화연구라는 세 가지 절차를 통해 총 51개 디자인자산을 선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온 연구물은 2010년 한 해 동안 단행본, 영상, 전시 등 다양한 형태로 가공되어 활용되었다.
사업 이름으로 사용된 말 ‘디자인자산’은 그 시기에 만들어진 콘텐츠와 함께 소비되다가 어느 틈엔가 우리 주위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디자인회사의 디자인자산. 어느 날 문득 떠오른,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AG ISSUE 6호에서는 2009~2010년 즈음에 활발히 사용되었던 ‘디자인자산’을 사업 명칭이 아닌 디자인용어로서 재발견하고자 한다.

‘디자인자산’의 정의
2009년 서울시에서 사용한 ‘디자인자산’의 의미는 ‘디자인 관점으로 바라본 혹은 바라볼 수 있는 (서울의) 자산’이다. 이는 사업을 설명하기에는 별 무리가 없으나 용어로 사용하기에는 모호한 개념이다. 마케팅 분야의 용어 ‘브랜드자산’의 경우, 세계적인 브랜드 마케터인 케빈 레인 켈러(Kevin Lane Keller)는 이를 ‘어떤 제품 혹은 서비스가 브랜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바람직한 마케팅 효과’이자 ‘마케팅활동에 대한 소비자의 차별적 반응’이라고 정의하였다. 즉 브랜드가 없어도 제품이나 서비스가 존재하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아닌 브랜드가 있을 때만 얻을 수 있는 효과 또는 반응이 곧 ‘브랜드자산’이다.
디자인을 기업 및 단체의 무형자산으로 본다면, 디자인자산 역시 브랜드자산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켈러의 정의를 빌린다면 ‘디자인자산’은 ‘어떤 제품 혹은 서비스가 디자인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긍정적인 마케팅 효과 혹은 차별적 소비자의 반응’이다. 그러나 디자인의 대상이 특정 제품이나 서비스, 마케팅 활동에만 국한되지 않으므로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수정할 수 있다. ‘어떤 대상을 디자인함으로써 나타난 긍정적인 효과 또는 차별적 반응.’
이 정의를 따르면, 서울의 디자인자산은 ‘무언가를 디자인함으로써 경제, 문화 등의 측면에서 서울에 발생한 긍정적이고 차별적인 효과나 반응’이라는 전보다 훨씬 구체적인 개념을 지시하게 된다. 무엇이 디자인자산이며 무엇이 디자인자산이 아닌지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이 단계에서 가능하다.

디자인회사의 ‘디자인자산’
디자인 활용 업체가 보유한 디자인자산과 디자인 전문회사의 디자인자산은 무게감이 사뭇 다르다. 디자인 전문회사는 무언가를 디자인한 결과가 기업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디자인함으로써 바람직한 경제적 효과 또는 반응을 일으키지’ 못하는, 다시 말해 디자인자산이 없는 전문회사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디자인회사가 겪는 경제적 위기는 경기 침체와 같은 외재적 요소뿐 아니라 디자인자산의 부실함이라는 내재적 요소에도 기인할 수 있다.
디자인 부흥기였던 1990년대 한국에는 수많은 디자인 전문회사가 설립되었다. 나라 전체가 어려웠던 IMF 시기에도 이듬해 매출액이 증가할 것으로 예측할 만큼 당시 디자인 업계의 성장은 눈부셨다. 그 시절 디자인 전문회사들은 어떤 디자인자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한국디자인진흥원(KIDP)이 1998년 초 실시한 ‘디자인 전문회사 인력현황 및 실태조사’ 보고서에는 디자인 회사들의 주요 투자 내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97년 매출액을 기준으로 각 항목별 투자내역을 살펴보면 인건비에 대한 투자가 매출액의 26.0%(2억4천9백4십만 원)를 차지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함. 매출액이 적은 업체일수록 대출액 대비 투자율은 높아, 매출액 2억 원 이하의 업체에서는 총 투자율이 131.4%로 상당한 적자를 감수하면서 운영하는 상황임.

디자인 전문회사 인력현황 및 실태조사, 한국디자인진흥원, 1997

몇 쪽을 넘기면 이와 더불어 읽기에 인상적인 내용이 이어진다.

디자이너의 업무 만족도는 높다(46.8%), 보통(47.2%), 낮다(6%)로써 비교적 높은 업무 만족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디자이너의 업무 만족요인은 ‘업무의 전문성’. ‘능력발휘 기회’ 등 업무 자체 요인이 주로 나타났고, 디자이너 업무 불만족 요인은 ‘업무과다’, ‘임금수준 미흡’, ‘회사의 불확실한 장래’ 등 회사 체계에 대한 것이 주로 나타났다.

디자인 전문회사 인력현황 및 실태조사, 한국디자인진흥원, 1997

디자인 전문회사의 인건비에 대한 투자는 비교적 최근인 2013년에도 다른 항목에 비해 월등히 높다고 조사되었으나 ‘저임금에 따른 전문 인력 부족’ 역시 심각한 상태였다. 디자이너의 업무 만족도는 2007년 조사에서는 보통(65.4%), 높다(23.9%), 낮다(10.7%)로 전체적인 만족도가 10년 전보다 크게 떨어졌으며 2011년부터는 조사되지 않았다.
디자인 전문회사에서 디자이너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투자 비중이 가장 높은 핵심 자산이다. 그러나 이들이 느끼는 감정은 언제부터인가 간과되고 있다. 디자이너의 업무 만족도는 ‘무언가를 디자인함’으로써 생겨난 결과이며, 이들의 ‘높은 업무 만족도’는 다시 좋은 제작물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됨으로써 회사에 수익과 명성을 안겨 주는, 바람직한 경제 효과에 해당한다. 당시에 이런 업무 만족감은 디자이너가 대기업이 아닌 디자인 전문회사를 택하는 결정적 이유이기도 했다. 디자인회사에서 디자이너의 업무 만족도는 중요한 디자인자산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많은 디자인회사는 이 자산을 거의 잃은 것으로 보인다.

시사점
사업 명칭으로서 언급된 ‘디자인자산’은 디자인계에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디자인용어로서 재정의한 이 말은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 준다. 먼저, 객관적인 관점에서 무엇이 디자인자산이며 여러 디자인자산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논의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디자인회사라는 전제를 달았을 때는 디자인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 또는 집단이 소유해야 할 자산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 ‘디자인자산’은 분명 디자인 현장에서 실무자가 서로 소통하는 데 필요한 용어는 아니다. 그러나 디자인 현상을 파악하고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용어임은 분명하다.
인간의 삶과 그 본질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을 철학이라 한다. 철학이 없어도 인생은 흘러가고 지식과 산업은 발달하겠지만, 그 깊이는 상대적으로 얕아질 수밖에 없다. 무엇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가, 무엇이 디자인회사를 디자인회사답게 하는가와 같은 본질적 물음은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 용어는 개념을 담는 그릇이자 논의의 시작점이다. 디자인 분야가 스스로 깊이를 더하고 근간을 다지기 위해서는 제 분야의 고유성을 담아내기 위한 용어를 계속해서 발굴하고 정립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AG ISSUE 12. 2015.5.12
(원 글에서 일부 표현 수정함)


참고문헌
《디자인 전문회사 인력현황 및 실태조사》, 한국디자인진흥원, 1997
《디자인 전문회사 인력현황 및 실태조사》, 한국디자인진흥원, 2007
<브랜드 수명주기(Brand Life cycle)에 따른 브랜드 자산(Brand Equity) 발전 방향 연구>, 브랜드디자인학연구, 3(1), 2005
<브랜드 자산>, KOCW, 문화와 국가브랜드(최선경) 강의 자료
<서울의 디자인 자산은 얼마입니까>, 서울문화투데이, 200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