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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글] 디자인 용어로서 보는 ‘이야기’

이야기가 하나의 산업으로 분류되는 시대이다. 2014년부터 이야기 산업의 범위와 실태를 조사하는 여러 연구가 진행되었고 이야기 산업 활성화를 위한 법 제정 및 플랫폼 구체화가 본격화되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간 디자인 분야에서도 이따금 그러나 주요하게 언급되었던 단어이다.

“지금 시대에서 스토리가 없는 디자인은 죽은 디자인과 같아요.”

삼성전자 공식 블로그, 2012

우리는 ‘이야기’의 사전적 정의를 알므로 이 문장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스토리 없는 디자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나의 산업으로서 육성되고 있는 ‘이야기’와 현시대의 디자인에 생기를 불어넣는 ‘이야기’는 과연 같은 의미일까? 어떤 단어가 한 분야에서 주요하게 언급될 때 그것은 지시적 의미를 넘어 특정한 개념을 담아낸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같은 개념을 표현하고자 그 단어를 사용하면 그것은 용어가 된다. 이번 호에서는 디자인 용어로서 ‘이야기’의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콘텐츠의 원천 재료: 줄거리로서의 이야기

“지난해 중국에서의 ‘별에서 온 그대’ 열풍은 한류의 지속적 확산을 이끌 새로운 동력으로 자리매김했다. 배우들의 열연과 웰메이드 연출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흡입력 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문체부, 이야기산업 진흥 기반 공론화 나서>, 연합뉴스, 2015.7.9

《표준국어대사전》은 이야기를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로써 가장 먼저 정의한다. 이야기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인물, 사건, 배경 등
3요소가 필요하며, 이들로 구성된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줄거리는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로써 2차 가공된다. 《2014 이야기 산업 실태조사》(한국콘텐츠진흥원)는
이야기가 “주로는 ‘수용자의 정서적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발신자가 인물, 사건, 배경 등의 요소를 배열하여 만들어낸 줄거리’를 의미하며, ‘정서적 공감을 기초로 움직임을 이끌어내기 위해 만든 서사 구조’의 의미까지 포함”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줄거리로서의 이야기는 콘텐츠를 제작하는 핵심이자 원천 재료이며, 때로는 의미 있는 디자인 재료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책을 디자인할 때 원고의 줄거리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줄거리 유무로 디자인의 가치를 평가한다는 접근은 어불성설이다.


디자인의 원천 재료: 경험으로서의 이야기

“말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아내가 자신에게 항복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멘디니의 욕구를 다른 남성 소비자들도 직관적으로 느끼지 않을까? 솔직하고 사실적인 이야기는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공감을 일으키고 구매 욕구로 이어진다.”

<디자인경영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는>, 연합뉴스, 2011.7.22

“과연 소비자가 갈구하는 제품은 평범한 것이 아닌 특별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기능성과 함께 감성을 자극하는 스토리가 세올 디자인에 열광하는 이유다.”

<색다른 스토리가 있는 감성 디자인>, 디자인정글, 2006.6.20 (2022년 1월 현재 검색 실패 , 해당 기사의 인용 글만 검색 가능)

이탈리아 디자이너인 알렉산드르 멘디니의 와인오프너나 한국 세올디자인컨설팅의 첼로 케이스는 인물, 배경, 사건으로 구성된 특정 줄거리에서 출발한 디자인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여기에 담긴 ‘이야기’를 읽고 정서적으로 공감한다. ‘이야기’의 또 다른 정의는 바로 ‘자신이 경험한 지난 일이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남에게 일러 주는 말’이다.
UX 개념의 창시자인 도널드 노먼 박사는 2011년 성균관대 총장과의 대담에서 “미래는 ‘경험 디자인’이 될 것이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하고 경험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에 더 집중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디자인 분야에서 ‘경험’은 화두를 여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디자인 패러다임을 표현하는 핵심 용어로 자리 잡았다. 사용자의 경험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된 대표적인 도구는 ‘디자인리서치’이다. 과학적 기법을 통해 사용자를 관찰하고 분석하여 더 나은 경험을 만드는 ‘디자인리서치’는 디자이너 개인의 역량에 온전히 의존했던 기존 디자인 과정을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영역으로 크게 한 걸음 옮겨왔다. 그러나 디자인에는 여전히 뭐라 규정하기 어려운, 디자이너의 직관으로 실현되는 미지의 영역이 남아 있다.
‘이야기’는 경험 디자인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디자인리서치’와는 다른, 디자이너의 감성과 통찰에 따른 문제 해결을 가능케 한다. 남다른 시각으로 일상을 재발견하는 디자이너의 독창성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부러움과 경탄의 대상이 되어왔다. 만약 ‘이야기’에 “사용자의 정서적 호응과 감탄을 끌어내기 위해 디자이너의 시각으로 재발견한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경험”이라는 의미를 담는다면, 우리는 ‘이야기 있는 디자인’이 왜 이 시대에 중요하며 그것이 경험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역시 설명할 수 있다.

이야기는 줄거리나 경험 외에도 구담, 소문, 소설 등의 사전적 의미를 지닌다. 다양한 의미만큼이나 빈번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일상어로서 지나치기 쉽지만, 디자인 분야에서 쓰이는 단어 ‘이야기’는 때로 이런 단순 지시적 의미가 아닌 디자인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는 개념을 담고 있다. 화자들이 이를 의식적으로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의식적으로 썼다 한들 명확하게 의미가 정립된 상태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디자인 용어로서 ‘이야기’는 잠재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같은 디자이너의 창조적 디자인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는 지속해서 발굴되어야 한다.

AG ISSUE 12. 2015.8.11


참고문헌
<감성 디자인’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매일경제, 2013.8.29
<문체부, 이야기산업 진흥 기반 공론화 나서>, 연합뉴스, 2015.7.9
<삼성전자 디자인을 말하다 – Story 편>, 삼성전자 공식 블로그, 2011.5.24
<도널드 노먼 박사 – 김준영 성균관대 총장 대담>, 성균관대 총장실 블로그, 2011.7.22 (현재 접속 불가)

<Cover Story `감성디자인 구루` 도널드 노먼 박사 – 김준영 성균관대 총장 대담>, MK뉴스, 2011.7.22
<색다른 스토리가 있는 감성 디자인>, 디자인정글, 2006.6.20 (현재 접속 불가)
《2014 이야기산업 실태조사》, 한국콘텐츠진흥원, 2014.10